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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으로 글자를 읽게되고 세상이 달라졌어"
늦깎이 한글 배움터에서 어르신들을 만나다
2019년 10월 11일 (금) 15:02:35 김라현 기자 sbdfng@naver.com

어릴 때 한글을 뗀 우리는 문자를 읽고 쓰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기에 문맹의 어려움도 생각해보지 않았을뿐더러 의식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있다. 낯선 외국에 떨어진 것처럼 문맹이 보는 세상은 어려운 문자로 가득하다. 거리에 가득한 간판과 각종 고지서 심지어 버스 노선도조차 글자다. 잠깐의 불편함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부딪치는 문제다.
까막눈이라 겪었던 설움과 어려움은 사상구 학장동 행정복지센터 한글 교실을 다니는 이들에게 더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사상구 학장동행정복지센터의 어르신 한글 교실을 방문했다. 이 강좌는 화요일, 목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진행된다. 화요일 오전 수업이 한창이다. 입을 모아 글을 읽는 소리가 교실 문을 넘어 들려온다. 더듬더듬 글을 읽는 소리는 초등학교 교실을 연상시켰다. 창문으로 살짝 엿보니 책상을 붙여 옹기종기 모여 앉은 어르신들이 교재를 손으로 짚어가며 집중하고 있었다.
오늘은 읽고 받아쓰기를 하는 날이다. 선생님이 불러주는 문장을 한 자씩 정성스럽게 받아 적는다. 강필분(사상구·73) 씨는 "글을 배운지 2년이 넘었어. 보이는 걸 읽을 수 있고 뜻도 알 수 있게 됐지"라며 세상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돋보기를 쓰고 연필을 움켜쥔 그들의 모습에 학구열이 엿보인다. 잘못 쓴 부분을 선생님이 알려주면 "여기는 이 받침이 오나요?"하면서 다시 고쳐 적었다. 받아쓰기가 재미있다는 중급반 반장 김정선(사상구·77) 씨는 "예전에는 간판도 못 보고 내 이름도 못 썼어. 그래서 병원 가는 것도 무서웠지 장사할 때는 숫자도 글도 몰라 돈을 떼인 적도 있었어"라며 고달팠던 기억을 토로했다.
받아쓰기 도중 선생님이 발음을 잘못했지만 학생들이 오히려 틀린 걸 바로잡았다. "이게 맞는 거죠? 내가 맞았네요"라며 자신의 실력이 늘었다는 걸 확인한 듯 학생들은 즐거워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공부를 그만둬야 했던 진기순(사상구·63) 씨는 글을 몰라 답답함을 많이 느꼈다. "공부가 갈수록 어렵지만 모르는 걸 배우는 게 즐거워"라고 했다. 이어 "남을 통해서 하던 일을 이제는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동안 못 갔던 은행도 가게 되어 너무 좋다"며 웃음을 보였다.
반장을 시작으로 각자 받아 적었던 문장을 차례로 읽기 시작했다. 막힘없이 혹은 머뭇거리며 읽는 소리가 정다웠다. 한 학생의 노트에 `배워야 산다'라고 적혀있는 다짐이 눈에 띄었다. 먹고 살기 바빠서, 형제가 많아서 등의 이유로 글을 못 배웠던 이들이 배움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다. 할머니들은 쉬는 시간에도 책을 놓지 않았다.

교실은 중급반과 초급반이 같이 사용하고 있다. 서로 번갈아 가며 수업을 하는데 기다리는 동안 수업 내용 중 어려웠던 부분을 복습한다. 할아버지 두 분으로 구성된 초급반은 한 사람씩 선생님이 가리키는 칠판 글씨를 읽었다. 잘 모르는 건 서로 물어보기도 하고 틀렸다며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소설을 다뤘던 중급반과 달리 초급반은 짧은 글을 받아썼다. 손이 움직이면 입도 같이 바빠졌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어려웠던 부분을 두 번씩 더 쓰며 복습했다. 글을 배우고 싶어 직접 교실 문을 두드린 전판식(사상구·80) 씨는 "공장 일을 할 때는 필요성을 못 느꼈는데 퇴직하고 나니 스스로가 답답했어"라며 글을 배우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했다.
한 어르신이 틀릴 것 같다고 걱정을 하자 선생님은 "보고 써도 괜찮아요"라는 다정한 말을 건넸다. 그 말을 듣고서 마음이 바뀌었는지 안 보고할 수 있다며 용기를 냈다. 미간에 주름을 한껏 잡고 연습 노트에 글을 꾹꾹 눌러 쓴다. "우리 집 강아지는 털이 희고……" 칠판에 적힌 글을 읽을 때 실수를 하자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1년이 조금 넘은 초급반은 아직 글을 읽는 게 미숙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배우려고 애쓴다. 새로운 길을 갈 때 무서움 없이 갈 수 있게 되었듯이 배움의 길에서 이들의 걸음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교실은 학생뿐만 아니라 선생님도 특별하다. 학생들과 나이대가 비슷한 김윤선(동구·72) 선생님은 40대에 통과한 검정고시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만학도이다. 이후 대학과 대학원까지 끝마친 그녀는 공부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다문화 한글 교사로 활동했다. 현재 은퇴 후 재능을 살려 한글 교실 선생님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녀는 "나의 배움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줄 수 있어 보람차요"라며 늦은 나이에도 공부하는 학생들이 대단하다고 했다. "다들 먹고 살기 바빠서 글을 못 배운 분들이지만 정말 열심히 살아온 분들이 존경스러워요"라며 학교에 오면 행복하다고 한다.
못 배운 한을 품고 살아온 이들은 늦은 나이에 시작한 배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대부분의 학생과 달리 수업을 마치면 집에 돌아가 복습을 한다. 어르신들은 몇십 번 몇백 번을 써도 다음날이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배움을 이어나가고 있다. 도전에는 나이가 없다는 말처럼 젊었을 때 못 했던 일들을 70, 80세가 되어서 용기를 냈다. 침침한 눈엔 돋보기를, 주름진 손에는 뾰족한 연필을 든 모습은 어느 누구보다 멋있다.
                                                                                                          김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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